책을 읽고

서울건축 개화기-일제강점기 / 임석재

under3sky 2019. 1. 1. 23:21




  개화기, 강점기, 근대화를 거치면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병리 증상에 시달리고 있고 사회적 문제로 귀결되었는데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1. 일제강점기

  2. 건축환경의 갑작스런 변화

  3. 이질적 건축환경에 시민지배 사관 강요

  4. 해방 이후 식민잔재청산 실패와 속성 근대화

 


개화기 - 18C 서학과 가톨릭의 유입

 

  서양의 양식과 사조

  한국의 전통시대에는 없거나 약한 개념이었다. 서양은 고딕-르네상스-바로크-신고전주의 같은 확연한 사조구별이 있었고 형식화가 뚜렷했다. 예술가의 솜씨와 능력이 사용자의 편의나 자연과의 관계보다 우선시 되었고 이상적인 미에 도달하기 위해 예술은 중간과정이었다.

 

  자연재료를 보는 시각의 차이

  전통건축은 자연재료를 재료의 본성에 건축가의 손맛을 더한 합작품으로서 공예미학의 대상으로 보았다. 서양건축의 장식은 건물을 먼저 세운 뒤 표피 위에 더하는 부가물 성격으로 보고, 목적의식이 강하여 특정 형태를 지목한 후 사실적·직설적으로 모방한다.

 

  전통미학에서 서양미학으로

  건물 구조의 비대칭에서 대칭으로, 분리된 영역이 통합으로, 소통용 문은 형식화된 출입구로, 투명공간에서 불투명공간으로, 곡선과 수평선에서 직선과 수직선으로

 

  전통과 서양의 공존

  고려시대에 홍복사 라는 절이 조선 세조 때에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중건되었다. 16C초 연산군 때 승려를 몰아내고 기생집으로 바꿔 사용했고, 중종 때에는 건물을 해체하여 다른 공공건물의 건축재료로 써버렸다. 1897년 대한제국 시절 탁지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존 브라운의 건의에 따라 고종이 도심공원으로 복원하였고 원각사 탑이 남아 탑골공원이라 불렀다. 기본 개념은 서양의 근대적 도심공원을 따랐고 소속은 황실공원이었지만 설치한 시설 등 건축적 개념은 민족 공원이었다. 1902년 고증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군악행사를 거행할 장소로 팔각정을 지으면서 활기를 띠었다.

 

 

일제 강점기

 

  한일합병 이후 전통건축과의 화해나 통합 없이 서양 건축이 한반도 침략에 따라 강제로 받아들였다. 1930년경 서울에 전통 건축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식민사관 아래에서 전통 건축은 서양 건축과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대립적 위치에 세워지면서 서양화를 위해 버리고 포기해야 할 대상으로 비하된다. 19C 유럽 역사주의가 대표양식으로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고 제국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화된 서양양식들이 나타난다. 제국양식의 특징은 수평과 수직을 대비시키면서 기둥은 크고 높게 만들어 돌출시킨다. 출입구 형식화와 중앙부를 강조하고 큰 덩어리 구성과 강한 장식 등으로 과시적이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제국양식의 대표 서울역

  일제강점기 때 건물 가운데 조선총독부 다음으로 컸지만 당시 도쿄역과 함께 계획되면서 도쿄역보다는 더 작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대륙 진출을 위한 물리적 인프라를 완성했다는 상징성도 지녔다. 수평-수직 구도는 표면적으로는 합심해서 거석 구조를 만들고 내면적으로는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립은 거석 구조의 분위기를 갈등과 긴장감으로 몰고 간다. 보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줘서 복종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목적이다.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의 건축 특징

  1. 서양 양식 내에서 유럽의 역사주의 제국양식과 구별되는 영미의 컨트리하우스로 한정시킴

  2. 지배 이데올로기와 달리 기독교를 전파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양식 근대 교육 이식이 목적

  3. 한국의 전통미학이 나타남

  4. 산업화된 건축방식이라는 동일성이 나타남

 

  영미 기독교 건축과 동일성의 정착

  영미 기독교 건축은 검소함의 미학은 배제하고 동일성만을 절대선으로 좇는 잘못된 방향으로 이어졌고 근대적 제국 양식과 함께 1920~30년대 동일화를 이끈 대표 주자가 되었다. 창의 동일 반복, 수직 창을 묶어서 설계.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표준화 여부에 따라 공사비 차이가 크기 때문에 효율에 따라 격자 구도와 동일한 창 반복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학교건축은 학생을 통제해야 하는 기능적 목적이 있기 때문에 동일성을 허용할 수 있는 폭이 상대적으로 컸다. 종교는 정신적·사회적 가치관까지 이르고 그대로 사회적 영향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파급력이 컸다.

  일제에 대한 대안적 외세로서의 기대, 희망과 뒤늦은 근대화를 만회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전통미학은 동일성의 미학으로 대체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 때 미국과 연합국의 도움으로 적화통일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나라를 건져낸 역사와 맞물리면서 영미가 중심이 된 서양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한국 개신교는 종교 건축 양식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유럽 가톨릭 양식을 무단 복사해서 쓰다가 다시 시대 조류에 따라 일반 부동산 건축이나 최신 유행양식을 단순 반복해왔다.

 

  한국사회에 동일성이 끼친 폐해

  동일성 자체 나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국민 정서와 건축미학이 비대칭임을 볼 때 동일성은 이와 반대되는 대칭이 극단화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감성과 맞지 않는다. 동일성이 가장 심하게 나타난 건물 유형은 오피스빌딩, 아파트, 학교 셋이다. 동일한 창의 반복 및 이에 해당되는 실내 구성인 일직선 복도와 가지런한 방이 공통점이다. 미국식 자본주의나 미국 경제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고 이는 IMF 사태나 국제 금융위기 이후 종속현상이 더욱 심해져서 건축활동을 대단위 개발사업 한 방향으로 편중시키는 주범이 되었다

  동일성에 의존하는 부동산 건축은 서양에서도 근대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때 국가적 사업으로 유행하였다. 그러나 서구 선진국에서 부동산 건축이 강요하는 동일성의 삭막함과 저질 환경에 대한 저항이 초창기부터 상당히 심하게 일어나서 오래가지 못하고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축소되었는데 우리는 이러한 자정운동을 하지 못한 것이다.

 

  민족건축 설립의 열망

  천도교 중앙대교당. 명동성당과 종교적으로나 건축적으로 모두 경쟁관계에 있었다. 명동성당이 서학의 근거지로서 프랑스의 완성된 건축 양식인 고딕을 수입해서 한 가지로 통일감 있게 지은 반면, 천도교는 동학을 바탕으로 한 자생 민족 종교로서 통일된 건축양식을 갖출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조계사 같은 전통 사찰 양식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동학은 단순히 서학에 맞서기 위해서 뿐 아니라 유불도의 전통 종교가 한계에 이르자 이를 대체하려던 목적도 가졌기 때문이다. 19C 영국의 기독교 부활운동을 담당하던 빅토리안 고딕양식을 채택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지만 일본 건축가가 지은 것이 아쉽다.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로 중세 기독교의 벽돌장식 부활. 태극을 응용해서 만든 천도교 상징 문양을 실내장식 모티브로 활용함. 기단을 화강암으로 3단으로 쌓아 천지인 개념을 상징. 도로쪽 측면은 똑같은 창이 5번 반복되다가 마지막 것이 밑으로 푹 꺼지면서 낮아지는 등 반복과 비대칭의 미학을 적절히 섞어 안정된 질서와 파격의 재미를 함께 준다.

 

 

해방 이후

 

  늦은 개항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대원군 콤플렉스가 강하게 퍼지면서 근대화는 국가의 운명으로 여겨졌고 근대화와 서구화는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유교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지배 정체에 대해서는 긍정·부정적 측면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최악의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며 우리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앞 시대에 대해 혁명적 정리를 하지 못해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 건축의 장점은 사라지고 나쁜 점만 부각되었다. 조선 왕조건축과 일제 제국양식은 주인만 바뀌었을 뿐 통치건축으로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부정적·패배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식민 과거를 청산하고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어야 하는 시기에 건축은 독재 정권을 합리화하거나 압축 근대화를 지탱하는 주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식민 지배를 위해 제국 양식으로 지은 각종 건물들이 1980년대 까지 그대로 공공건물로 사용된 것이다.

 

 

  책의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서울건축에 대한 개화기~일제강점기의 흐름이 이해가 조금 된다.